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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결언
등록날짜 [ 2009년03월01일 02시53분 ]
 

평 가(Assessment)

 1907년 초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중요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일본 이주민 노동력의 급격한 증가는 서해안 지방 미국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캘리포니아에서 대응조치가 취해지게 되었다. 노동력 경쟁의 두려움의 근원적인 원인은 일본군사력에 관한 불안과 관련이 깊었다. 근래 들어 러시아와 육상 및 해상 전투 모두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사실상 무방비도시인 서해안지역과 하와이에 대한 군사적 위협으로 비춰졌다.

시대 상황과 맞물려 일본 정부가 캘리포니아에서 일본노동력에 대한 규제에 대응하여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 그러나 사실상 거리가 멀었던 - 은 이주민노동력 문제를 전쟁의 위협으로 급속히 몰고 갔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일본과 미국 간 관계를 검토한 결과 1907년도의 상황이 우리의 원래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역사적인 작업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미국이 군사적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일본이주민에 대한 해결책을 활발히 찾고 있는 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은 육 · 해군성 합동부으로부터 권고받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이행하라고 주문하였다. 이러한 방법들은 대서양 함대에서 태평양 함대에 이르는 전 함대의 전략적 함정 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전략적 정 수에 따른 백색함대의 항해는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극동지역이 해군과 관련한 주요지역이라는 그릇된 암시를 하게 된다.

 게다가 이 캐리비안-대서양에 관련한 방침에 대한 이해는 1908년 11월 어진 Root-Takahira 협정에 의해 공식화된 미해군과 일본의 친선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했다. 미국의 지도자들, 특히 해군 책임 장교들은 독일이 평화에 큰 걸림돌이라는 것에 수긍을 하였다. 욱 깊은 상호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중요했던 일본과의 껄끄러움을 해결하는 것은 더욱더 전지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이유는 미국 - 일본 간의 친교가 미국으로 하여금 태평양에서 미국의 약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도록 대서양 함대에 집중하는 이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독일에 대해 미국은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이는 1903년 독일의 베네수엘라 봉쇄, 1905-6년에 이르는 모로코에서의 독일의 위협적 위치로 인해 계속해서 지되었다. 1903년부터 1913년까지 대부분의 미국해군전력의 함정치는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유럽 쪽으로 몰려있었다.

<전함 Maine>

<백색함대의 일본 방문을 기념하여 발행된 엽서. 1908년 10월>

<도쿄의 미국 수병들> - Stephen and Michiko Levine Collection -

<백색함대 세계일주를 시작하며 Connecticut함이 대서양 함대를 이끌고 햄프턴 로드를 나오고 있다. 1907년 12월> - 해군역사관, 사진전 -

 

 세계 일주의 성공적인 수행은 미합중국이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미국 내 극소수인 루즈벨트와 동시대 사람들은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즉각적 행동을 취했던 루즈벨트의 행적을 두고 논의를 거치기도 했다. 미국인들에게 열린 오직 하나의 결정 그것은 즈벨트가 말한 대로 미국이 세계에서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미국사람들은 함대와 함정에 대한 영광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설이지 않았다. 몇몇의 유럽인들은 이러한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비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함정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태평양으로의 미 해군 전력은 유럽으로 하여금 태평양 위 힘의 균형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다.

  원거리증기선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수의 함정이 참가한 것을 포함하여 여러 면에서 선례가 없었던 함정들의 일주는 세계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함정들이 입항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함정들은 특별한 오락의 기회를 제공 하였으며 이는 사람들이 백색함대의 중요성을 더욱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16척의 하얗고 연한 가죽 빛을 띤 1급 전투함을 보는 것은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1백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 항에 입항하는 백색함대를 환영하기 위해 금문교에 죽 늘어서있었다. 50만 가량은 시드니에 모였고 십만 명은 다른 항구에서 백색함대를 맞이하였다.

  백색함대를 향한 태도는 경외의 눈빛으로 둘러싸였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1908년 해군의 퍼레이드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전투함과 함정들을 두려워하여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결코 함을 방문하지 않았다.

함대는 대중의 의식 속에 확실히 자리 잡음으로써 성공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동반했으며 안보관계와 특히 태평양 연안에 관한 높은 관심을 이끌어 냈다. 투어가 추진된 모든 곳에서 대중적 지지와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해군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출은 함대의 일주 14개월 동안 해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는데 특히 중요하였지만 간과되어 온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그것은 바로 함정의 디자인과 해군 조직에 관한 것이었다.

  비록 해군과 그 조직의 효율성을 증명하는 것이 많았지만 실제로 함정은 함정의 부속과 작동상태를 점검해 본 적이 드물었다. 전투함 디자인에서 러나는 문제점들, 무장 벨트가 잘못 위치해있다거나 안전하지 못한 무장체계 탑재 그리고 해군조직의 비체계성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점들을 수정하지 하고 계속해서 지속시키는 점 등 정확하지 못한 점이 산재해 있었다. 평화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 사이에 실행된 함정과 해군관련 정책들은 해군의 결점을 감추는 경향이 있었고 따라서 개혁의 목소리를 덮어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인들이 본 것은 약간의 어려움을 가지고 기나긴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해군이었다. 함대의 함정들은 아마도 적절한 디자인으로 고안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서양 함대의 세계 일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담한 외교정책의 뛰어난 예로써 제시되며 ‘힘의 과시’ 외교의 고전적 삽화로 등장한다. 그러나 비록 루즈벨트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여 그가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하였다는 교과서의 예보다는 해군전력함정가치의 공식적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함대의 필요성이 증대되기 전에 함대의 수행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한 신중한 대통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비록 외교정책이 기술적인 문제보다 우선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전투함에 대한 평가는 왜곡된 면이 있다. 종종 왜곡되는 것은 오늘날의 전투함보다 그 시대의 전투함이 기술적으로 신뢰도가 낮으며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함정을 설계하는 것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지에 관한 기술적 능력에 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태평양에 돌아왔을 때 각 부속품의 상태는 어떠할 것인가? 전투 비는 완벽히 되어있는가? 불충분하며 테스트되지 않은 태평양 연안의 설들이 과연 함정들의 요구에 맞게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긴 함정이 구호 혹은 후방 훈련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함대를 시험해야 한다는 요구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함대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일주는 해군과 국방부 차원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시행된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대가 일주를 시작하여 막달레나 만에 도착하였을 때 긴 항해를 지속하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전투시행 능력이 있는지 증명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의 교정책에 대한 강점과 한계선을 명확히 측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기본으로 하여 그는 외교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대를 사용하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때 루즈벨트는 일본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재정적 부담과 많은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내경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일본정부의 재정상황을 분석한 것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가까운 미래에 일본과 미국의 충돌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의 언론들은 친교의 정책을 연일 실어대고 있었다. 따라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최소한의 위험성만 가지고 일본의 초청에 응할 수 있었다. 1908년 독일 해군 카이저호의 위협적이고도 무분별한 행동과 계속되는 독일해군의 확장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과 친교를 맺을 명분을 더욱 굳건히 해주었다. 빌헬름(독일 수뇌부)이 유럽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것이라는 루즈벨트의 확신은 대서양함대에 지속적인 집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1909년 11월, 미 해군당국은 독일의 가속화된 건조작업의 결과로 독일이 세계1위의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일과 일본 중 누가 더 큰 위협이 될 지는 가늠하지 못 하지만 독일을 잠정적인 최대 위협요소로 규정하였다.

 


<필리핀에서 요코하마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난 미 전함 Minnesota. 1908년 10월>

 

 미국인들은 다시 한 번 독일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태평양 연안국인 호주나 뉴질랜드 또한 미국과의 지역유사성을 들어 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에 집중하게 되었다. 태평양 지역에서의 주요문제는 확장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일본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한 이후 이러한 국가들은 영국과 친밀하고 편안한 관계로 돌아섰다. 이러한 안보의 관심은 미국의 전쟁이나 외국 함대의 방문으로 인하여 표현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모국의 제국의 군대를 뉴질랜드 HMS와 태평양에 설치될 것으로 해석 되었다.따라서 1909년 뉴질랜드의 전함은 황국을 방어하는데 기함으로 기여되었다.

 항해의 무형의 양상, 평가의 어려움은 개인적인 접촉에 영향을 주었다. 무부의 기록에서 미국의 외교관들이 항구를 방문하면서 균일한 웃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를 보여준다. 뉴욕 타임즈는 함대의 항해에 대하여 수많은 광고를 통하여 “높은 수준의 지원병”라고 결론짓는다. 그들의 성공은 일본의 환호로 판단될 것이다. 잡지의 글귀에서 “미국 만세(Banzai to America)”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으며 아사이 신문은 넓은 마음과 친절한 미국 사람들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함대가 방문 하였을 때의 “비난 할 수 없는 행동 ”은 그들의 친밀감을 강화하였다. 지지신보에서 일본도 문으로부터 이익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제안 하였지만, 미국함대를 방문한 사람들이 미국에게 감사를 가지며 되돌아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국가의 시민 모두 방문한 후에 미국은 항해의 교육적 가치를 인지하게 되었다. 미국 대중들이 함대의 전진에 대한 많은 관심과 수많은 신문 잡지가 그들이 방문한 국가에 대해서 수천 개의 기사를 게재했다. 새로운 뉴질랜드인은 적당히 그들의 관심을 뉴질랜드의 광고로 돌렸다. 미국과 같은 나라처럼 긴 습관은 내부로의 관심을 가졌고  긴 선점은 광활한 자원의 효과적인 이용과 해안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미국의 이 항해는 세계로 향하는 전례가 없는 해군의 팽창을 가져왔다. 이것이 평화의 확산에 힘과 속도를 제공할 것이라는 제안은 다음 10년 동안 국제적으로 달성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험기간 동안 해군 무기체계는 운용은 주요고려사항이 되었다. 북해에서는 독일 해군과의 대립이 있었다. 첫 번째에서 언급한 것이 아닌 항해에서 중요한 두 번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남아메리카의 종교적 대립과 지중해의 해군 기지 건설 문제는 미리 예상되었으며 항해에도 지장이 없었다. 일본 해군의 계획, 1906년의 예산역시 미리 예상되었다. 동일하게 해군을 독립적으로 발달시키기를 원하는 호주의 열망은 1902년 정식 모임을 열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모든 것은 확실하고 미리 주어 졌으며 항해에서 분리할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항해는 함정과 해군이 인기를 끌게 해주었다. 최근 외국 항에 1급함이 16척이 입항한 것은 지역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전 보다  해군의 팽창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부가적인 인기는 이미 기술적인 발전, 지역 간의 적대감과 다른 요인에 의해 촉발되어, 존재하고 있는 해군 무기체계 경쟁에 기여했다.

비록 항해가 짧은 기간에 이루어 졌을지라도 이는 국제관계와 해군 무기체계에 긴 영향을 주었고 미 해군 스스로가 거대해 지는데 영향을 끼쳤다. 해군의 강요된 부재는 함의 유지와 승조원의 수리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부여하였다. 리오 데 자네이로로 향하는 길에 있었던 절망적인 연료의 부족 이후 엄격한 연료 절약이 시작되었다. Sperry 소장은 다음과 같이 함대가 이룬 성과를 자랑스러워했다. “경제적인 석탄의 소비로 효율성이 25%나 증가되었다.”  항해의 경쟁은 전함의 군사적 가치를 가속화했고 더 효율적인 기관 승조원과 기선의 항해 반경을 증가시켰다. 장기간에 걸친 항해에서의 반복되는 훈련은 지휘와 견시 능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함대가 리오 데 자네이로를 떠났을 때  Sperry는 장교들의 위치 고수능력에 대하여 끊임없이 보고 받았으며 이러한 재 확신은 “승조원은 함정에 속하고 함정은 바다에 속한다.”는 격언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하였다. “이곳은 함대안의 함정의 작은 함교에 속하지만, 큰 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매일 거리 측정 훈련, 막달레나 만에서의 연간 사격 기록 측정, 마닐라 에서의 전투 연습과 같은 사격 훈련은 좋은 결과를 빚어냈다.  “우리는 우리의 함포 사격 능력에 큰 진보를 이루었다” Sperry 소장은 뉴욕의 Lambs Club에서 감사하는 청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했을 때 전함의 1/3 크기의 표적에 명중시킬 확률은 23%에 불과하였으나, 우리가 돌아올 때쯤에는 50%에 도달 하였다.” 함대에서의 가장 높은 기록을 한 함정은 버몬트와 일리노이즈 이었으며 이들 함정은 주포로 16발 중 13발을 명중을 달성 하였으며 81.26%라는 인상적인 기록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상은 두 함정의 사격능력은 별도의 비용 없이 두 함정의 해군력을 의미한다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었고, 이는 해군 예산이 납세자들에게 큰 짐이 되었던 1909년에 중요한 고려요소가 되었다. 그들의 항해는 해군성에 함대의 석탄 량을 어림잡고 필요량을 준비할 귀한 기회를 제공했다. 석탄을 동아시아와 태평양 주변까지 공급하는데 긴 시간이 소요했던 장비부서의 실패는 함대가 항해할 때 중요한 군수 문제를 야기하였다. Sperry 소장은 아시아와 태평양 주변에서 외국석탄선이 25,000톤의 석탄 함정 조달에 실패하였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만약 우리가 상업적으로 적절한 해군을 보유하지 못했다면 정부는 충분한 석탄자원을 제공했어야 했다” 외국 국기를 단 석탄 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약한 믿음은 항해에 있어서 중요한 기술적 이유가 되었다. 중요한 전략 관계는 불가피하다. 전쟁이 발발하면 함대는 먼 거리에 위치하고 군수지원의 문제로 인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하고 미국의 과학자는 결론을 짓는다. 오늘 날 해군에 대한 가장 큰 필요사항은 함대의 크기와 해군의 목적에 부여하는 빠른 석탄선이다. 이러한 결핍은 1909년 해군계획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5개의 석탄선 건조가 허가되었으나 두 개가 건설 중에 있었다. 이러한 7척의 석탄 선은 세계 1차 대전 전까지 현대적인 석탄 선으로 건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료 보급의 문제는 함대의 주요 에너지원이 액체 연료인 석유로 대체되기 전까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기관의 신뢰도 증가와 연료 보존에 대한 주목할 만한 진보, 즉 함의 항해 경의 증가와 함대가 최선의 전비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함대의 지원능력은 해군성으로 하여금 전략적 재평가를 이끌어 내었다. 전함이 항해를 하기 전에는 일본 함대와 전투 전에 필리핀에 위치한 해군 기지에 수리와 유지를 위하여 연락해야 했다. 그러나 이 항해는 전함 함대가 극동으로 항해가 가능하여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음을 증명해 내었다. 항해 동안의 경험과 수집된 데이터에 기초해서, 해군 계획 처은 일본과 대응하기 위한 해군작전의 기간을 120 일에서 90일로 재조정할 필요를 느꼈으며, 더욱이 해군 위원회는 극동의 해군기지의 의존성이 적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주 태평양 해군기지가 하와이 진주만에 세우자는 결정을 지지했다.

 함대가 마닐라로부터 항해를 끝마쳤을 때 Sperry 소장은 항해의 유지와 효과적인 전투를 위한 우선권 변경과 필요한 수리의 세부 항목을 완성했다. 함정의 무게를 감소하고 초과중량을 줄이는 일이 시행되었다. 다섯까지의 중요한 일중 두 가지가 무게를 줄이는 일에 독점적으로 시행된다.

결과적으로, 민간인 참가자는  함대가 14개월과 43,000마일 이상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시했다. 이것은 확실한 결론 이었다. 함정은 다위에서 유지할 수 있음과 엔진의 확실성을 입증해 내었다. 또한 승조원의 자질을 입증해 내었다. 그러나 어떤 비평가도 이러한 수행이 평화로운 항해 시 수행되었다는 점을 제안하지 않았다. 옹호자들은 이런 항해가 전함으로써가 아닌 함대의 한 일원으로써만 시험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비평가들은 전쟁의 자질을 향상시키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유지했다.  잘못 설계된 포탑은 항해 중 100,000마일 동안 시험되지 않았다. 부적절한 위치의 장갑만이 실제전투에서 사용 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해군성 장관을 넘어선 Truman 대통령의 고려가 있었다. Newberry는 1909년도에 자신의 연 리포트에서 항해에 대한 주목할 만한 평가를 내린다. “해군 내에 기술적인 비평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물에 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시기에 그것이 시험되었지만 장교와 사람들이 그것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임무에도 그 함정과 승조원은 적합할 것입니다.”

비록 미국의 전투함 전대의 항해가 참여하는 화려한 국제적인 광경일지라도 이 시간 세계가 “극도의 교전상황”이라면 세계적 이벤트는 최소화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미국계 외국인 관계에서 화제가 되지만, 차후시간 외교적 성공 탓으로 돌리다가 항해는 일반적으로 기초가 되는 이유들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항해는 확실히 미국의 외국관계에 촉매역할을 했다. 비슷하게 지난 10년간의 무기체계의 경쟁은 항해에서 나온 것이 아닌 급격한 산업화 유럽대륙의 힘에 의해서였다. HMS Dreadnought의 출현과 1907년도의 두 번째 Hague Conference 의 실패, 전함의 항해는 단순한 현시였을 뿐 기경쟁을 야기한 주요 원인은 아니었다. 전투함 함대 항해의 의의는 그러므로, 발전하는 미 해군의 전,후 관계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새로운 해군이 흔들리는 함정에 익숙해지는 것의 시험은 첫 번째 효과이며, 태평양을 방어하는데 요구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 력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였다. 선례 없는 명성은 전함의 외형과 해군 직에 대한 평가를 촉구하였다. 두 항목 모두 부족하였다. 평가는 필수적이었고 자주 간과되었다. 함대의 에피소드는 해군의 현대화를 향한 힘든 과정을 조명하였다. 세계 일주를 하고 복귀한 함대는 단독적이고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함정으로 발전하였다. 세계 일주와 논쟁을 통해 미국 해군은 좀 더 이성적, 효과적이고 전문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조지 워싱턴의 생일날 완수한 세계일주를 축하하며 그린 Clifford Berryman의 만화. 워싱턴 포스트 시사만화가인 Berryman은 Theodore 루즈벨트를 기념하여 1902년 테디 베어의 모습을 창작하였다> - 해군도서관, 백색함대 스크랩북 -

<Connecticut함에서 백색함대의 귀향을 환영하며 연설하고 있는 Theodore 루즈벨트 대통령> - 해군역사관, 사진전 -

 

결 언(Foreword)


백색함대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Theodore 루즈벨트 대통령의 축사

함대는 1909년 2월 22일 14개월간의 43,000마일이라는 긴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들의 금의환향을 햄프턴 로드에서 맞이하였다. 기함 코네티컷에서 그는 그와, 그의 국가의 영광을 함대가 이룬 업적에 돌렸다.

 “여러분들이 이 항구를 떠난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세계를 일주한 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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