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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Narrative) 버지니아 ~ 아르헨티나
등록날짜 [ 2009년01월22일 03시38분 ]
<엽서> - Stephen and Michiko Levine Collection -

 


이야기(Narrative)

 1907년 12월 16일 따뜻하고 구름 낀 아침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버지니아 햄프턴 로드에서 대통령 전용 요트 노천 갑판위에 서 있었다. 그는 특유의 넓게 이를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며, 위대한 미 전투 함대가 분열 행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가 생각했다. 대통령과 해안가의 수많은 구경꾼들까지도 미 해군 대서양 함대의 황금 도장한 뱃머리와 담황색 상부 구조물을 제외하고 완전한 하얀색으로 칠한 16척의 군함이 햄프턴 로드 앞 바다에서 긴 행렬을 짓고 옆에는 보조 함정들과 더불어 나아가는 모습에 흥분하고 자랑스러워했다.

 “The Girl I Left Behind Me"라는 익숙한 노래와 함께, 훌륭한 승조원들이 탑승한 전투 함정들은 400 야드 간격으로 대통령 앞을 열 지어 나아갔다. 이 새롭게 지정된 전투 함대는 스페인-미국 간 전쟁이 끝난 이래로 임무를 맡은 함정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Kearsarge, Kentucky, Illinois, Alabama, Maine, Missouri, Ohio, Virginia, Georgiam New Jersey, Rhode Island, Connecticut, Louisiana, Vermont, Kansas, 그리고 Minnesota가 바로 그 함정들이다.

 두 개 전대의 두 개 분대는 훗날 ‘Great White Fleet’라고 불리는데 총 14,000명의 승조원들이 탑승하고 있었고 Robley D. “Fighting Bob" Evans 소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 모든 함정들은 증기 철선이 일주를 하기 이전까지 어떤 나라도 결코 시도한적 없는 규모의 해상 전개에 참여했다. 43000 일, 14개월의 일주는 6대륙의 20항구를 거쳤고,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전 세계로 새로운 전투 함대를 보내는 생각은 Rough Riders의 전직 대령이었고 한 때 미 해군 차관보였던 정열이 넘치는 루즈벨트의 창안물이었다. 윌리암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루즈벨트는 백악관에 오직 강력한 해군력을 통해서만이 국가의 권위와 능력을 세계에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용 요트 Mayflower호에서 열병하고 있다> - William Stewart Collection -

 

캐러비안의 푸에르토리코와 태평양의 괌과 필리핀을 점유하면서 세계 강자로서 위상을 1898년 미-서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국제 관계에서 주력으로 인정받았고 얻었다. 1904년 미국은 또한 관타나모 만, 쿠바에 해군 기지를 설립하면서 파나마 운하의 안전을 확보했다.

 루즈벨트는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 함대를 성장시켜 전 세계로 확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미국 조선소는 미 해군에 보다 나은 능력을 제공하기 위해 11척의 새로운 전함을 건조했다. 이는 본 해군이 1907년 태평양을 장악했고 필리핀에 잠재적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미국의 일본과의 문제는 미국이 1906년 러시아-일본 전쟁의 막바지에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한 이후에 빠르게 부상했다. 이 갈등 와중에 러시아 함대는 일본군에 의해 전멸해 버렸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해상에서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평화 회담에서 그들이 받을 만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얻는데 실패하였고 그들은 비난의 화살을 루즈벨트에 돌렸다.

  미국은 아직 전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일본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전력은 대서양에 집중되어 있었고 태평양에는 소규모의 무장 순양함뿐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 작은 전대는 미국이 공격적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필리핀 서쪽 해안 항구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서부 해안의 거주자들에게 미 해군이 그들을 지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재 확신시키기 위해서 루즈벨트는 대서양 전투 함대를 태평양으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대통령은 또한  이러한 이동 이후에 이 함대가 어떠한 상황에 이르는지 알고 싶었다. 함대가 출항하기 전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모든 실패나 실책, 결점 등이 전시가 아닌 평시에만 일어나기 바란다.”


<전함 코네티컷이 대서양 함대를 대양으로 이끌고 있다> - 해군역사관, 사진전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대규모의 성공적인 일주가 미 국민들에게  해군의 준비심과 힘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임을 믿었다. 이러한 인상은 그의 바람대로 4척의 전투함을 더 건조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일주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서쪽 해안에 도착한 이후에 함대가 지구 서쪽 방향으로 진행 할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대중 방송에서 그러한 의도에 대한 논의는 미국의 목표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반영했다.

 일주 계획이 대중화 되었을 때, 모든 이가 감명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렇게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일본의 공격을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대서양의 해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또한 파나마 운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폭풍과 불안정한 물살로 상당히 위험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1907년 12월 16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함대는 햄프턴 로드를 나선다>

<장교와 수병들이 함대의 첫 번째 기항지인 서인도 스페인 트리니다드 항에서 앵무새를 사고 있다> - 1907년 12월 23일, Around the World -

 

 Maine의 Eugene Hale 상원의원은 해군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일주에 관한 예산을 보류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물러서지 않고, 퉁명스럽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미 함대를 태평양으로 옮길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였고, 만약 의회가 대서양으로 함대를 다시 귀환시키려면 추가적인 기금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막을 수 없었고 12월 어느 아침, 회색 늘에 검은 연기구름을 내뿜으며 백색함대는 마침내 출항했다. 선두함 코네티컷에 탑승한 Evans 소장은 그의 지휘 하에 있는 대규모 함대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일찍이 “우리 함정들은 축제나 전투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항해 첫날 늦은 시간, Evans는 장교들에게 명하고 함대 인원을 편성했다. 함대는 서부 해안에 잠시 머문 후 태평양을 지나 수에즈 운하와 지중해를 거쳐 대서양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전 지구를 일주할 것이었다. 다음날 이러한 사항을 모두가 알게 되자, 전 세계 국가들은 함대가 자신들의 항구에 방문하는 것을 환영했다.

 일주의 첫 출발은 남대서양 지역 이였다. 12월 23일 베네수엘라 해안의 작은 섬 스페인 트리니다드 항구에 첫 기항하였다.

  1908년 1월 6일 적도를 지났고 12000명가량은 Davy Jones에게 소개되었다. 다음의 전통 입회식에서 다양한 모욕을 당했지만 모두는 King Neptune 왕국으로의 입성을 환영 받았다.

 

 



 

<백색함대가 적도를 지났을 때 지하 통치자의 명령에 의해 King Neptune과 그의 동료들은 적도를 한 번도 지나지 않은 승조원들의 통과를 허락했다>

- William Stewart Collection -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에 의해, 적도를 처음 통과하는 승조원들은 지하 통치자의 명령에 의한 의식을 시행한다. 이 의식은 함상 유희, 적당한 운동과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면도를 하고 목욕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King Neptune의 의식을 최초로 실시한 수천 명의 승조원들 중 한 명이었다(1908년 1월 6일)>

<적도제를 수행한 사람은 지갑크기의 카드를 받았다>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브라질 순양함 Almirante Tamandare를 엄호하며 입항하고 있는 모습. 유화. 1908년 1월> - 해군역사관, 사진전 -

 


 1월 12일 리오 데 자네이로에 정박했는데 안타깝게도 첫째 날 사건이 생겼고 이는 브라질과 미 해군사이의 친선 관계를 무너뜨릴 뻔했다. 이 모든 것은 두 연안 지역 사람들이 말다툼을 벌일 때 리오 데 자네이로의 한 술취한 폭꾼에 의해 시작되었다. 말다툼 중, 연안지역 사람 중 한명이 술병을 른 사람에게 던졌다. 그 술병은 의도했던 목표물을 지나 연기 자욱한 방으로 계속 날아갔고 바에서 술을 즐기고 있던 백색함대의 한 승조원에게로 향했다. 뒷 상황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거와 같았다. 승조원들은 그 희생자 주위로 모였고 연안 사람들은 지원병을 불러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해안 순찰대가 도착 했을 때 난투는 길거리로 번져있었고 서로에게 돌과 벽돌을 집어 던졌다. 해안 순찰대와 지역 경찰은 그들을 갈라놓고 승조원들을 함정으로 후송했다.

 다음날 심문을 통해 병기장은 민간인이 공격자라는 것을 밝혔다. 모든 증거 자료를 얻은 브라질 경찰관들은 이 결과에 동의하였고 관계를 회복했으며 공식적으로 미군 승조원들이 계속해서 리오 데 자네이로를 즐기도록 초청하였다.

 더 이상의 사건은 없었고 많은 승조원들은 지역 정치 퍼레이드에 참여하여 아마 잘 이해하지 못했을 슬로건을 외치며 즐겁게 행진했다. 브라질 Affonso Augusuo Moreira Penna 대통령은 “영예로운 미 해군” 이라고 말하고 외교부 장관은 “대륙의 자랑”이라고 말할 정도로 격찬했다.


<리오 데 자네이로로 입항하고 있는 전함 코네티컷과 Kansas.>

<1908년 2월 마젤란 해협에 들어서는 대서양 함대> - 해군역사관, 사진전 -

<1908년 2월 8일 아침, 마젤란 해협을 들어서는 미국 함대. Henry Reuterdahl 유화>



<석탄을 싣는 것은 며칠씩이나 걸리는 더러운 일이었다. 유정탑이 벙커에 석탄을 내렸고, 승조원들은 그것을 삽으로 펴야했다. 모든 기구와 사람을 덮은 석탄재를 없애기 위해서 며칠 더 걸렸다> - William Stewart Collection -


 

 리오 데 자네이로방문 중 Evans는 항해 동안 그를 힘들게 하는 고통을 겪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했을 때 사령관 직을 해임하는 책임을 지었다.

 심지어 트리니다드에 도착하기 전에 함정이 위협받고 있다는 괴소문이 군성 장관에게 까지 전해졌다.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경찰서장은 신원 미확인자로부터 무정부주의자가 함대에 공격을 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함대가 계속 위험 속에 있다는 인상을 준 이 소문은 태평양에 함대가 들어간 이후에야 종식되었다. 1월 21일 함대는 닻을 올리고 리오 데 자네이로를 떠나 남미 남쪽 끝 부근의 마젤란 해협으로 향하였다.

 거기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함정을 전복 시킬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Williwaws로 알려진 이 강풍은 함정이 해안의 바위에 부딪혀 산산 조각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이 해안은 Delusion Bay, Desolation Island, Pont Famin, 그리고 Dislocation Point라고 이름 붙을 정도로 악명 높은 곳이다. 한 신문은 난파와 더 나쁜 상황을 예언 했다.

 칠레 승조원, Chacabuco는 칠레의 Punta Arenas에서 함대를 만났고 함대가 석탄을 보급한 후, 해협을 항해하는 동안 함대를 안내했다. 상당히 짙은 안개와 거센 바람에도 불구하고 함대는 사고 없이 해협을 통과하였고 뉴스 편집자가 과대한 망상으로 생각해 낸 어떤 재난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칠레의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군함 관함식을 열면서, 남태평양에서 함대는 페루를 향한 항로를 설정해 나갔다.

 비록 반복되는 나날들이었고, 계속된 훈련은 승조원들을 바쁘게 하였지만, 당직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오락시간이 있었다. 함정에 피아노와 축음기, 양한 게임, 충분한 카드 그리고 핸드볼과 당구대를 실었다. 또한, 피아니스트와 무성영화도 있었다.

 영화를 언급하자면, 코네티컷에 근무했던 노병은 이렇게 말했다. “50분 동안 그들이 우리에 보여준 것이 단 하나있다...  사도 바울의 고난. 그것은 영화 시리즈였다. 그들은 아마도 어느 한 날은 9화를 보여주고 다음날은 47화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것에 즐거워했다. 함정은 해안의 낭떠러지와 그러한 비슷한 것들을 떨쳐내면서 항상 다양한 종류의 상태에 있었다.

 


<코네티컷의 전기기사 Leslie Haines는 집에 “진짜 소싸움”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그와 다른 수백 명의 수병들은 Peru의 Lima에서 “그것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또한 너무 실제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6마리의 소, 두 사람과 한 마리의 말은 두 시간여 만에 죽었다.”> - 해군역사관, Roy W. Davis Collection -

Michael J, Crawford 著
Donald C. Winter 序文
문무대왕함장 대령 박동우 譯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신인균(kdn040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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